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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창조과학자

루이 파스퇴르 (1822–1895)

뛰어난 과학자이며 진화론의 반대자

저자:
번역자: 한국어창조과학회 (creation.kr)

냉장고에 가서 우유를 꺼낼 때마다 우리는 프랑스의 뛰어난 과학자인 루이 파스퇴르를 기억해야 한다. 파스퇴르는 우유가 시게되는 원인이, 육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생물의 작용 때문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우유와 같은 식료품의 맛과 영양가를 변화시키지 않고 이들 생물을 죽이기 위해 서서히 가열하는 공정을 개발했다. 그 개발자를 기념하여 'Pasteurization (저온살균법)'이라고 명명한 이 공정은 파스퇴르가 인류에 공헌한 위대한 일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젊은 파스퇴르

루이 파스퇴르는 1822년 12월 27일에, 파리에서 남동쪽으로 400km 떨어진 프랑스 동부의 돌(Dole)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수년 후에 그의 가족은 인접 마을인 아르보와(Arbois)로 이주했다. 파스퇴르는 아르보와에서 학교를 다녔으나, 미술 이외에는 좋은 성적을 얻지 못했다. 그를 가르친 대부분의 교사들은 그가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무두질 공장에서 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파스퇴르는 지식을 늘리고 싶은 욕망이 간절했다. 교사들 중 한 사람이 그가 신중하고 끊임없이 공부에 접근한다는 것에서 잠재력을 발견했다.

파스퇴르는 열다섯살 때 파리로 가서 두 번째의 학교 교육을 마쳤다. 그는 향수병을 못 이겨서 아르보와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집에서 40km밖에 안 떨어진 브장송(Besancon)에서 다시 학업을 시도했다. 그것은 성공적이었으며, 1842년에는 브장송에 있는 왕립학교(Royal College)에서 과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파스퇴르는 프랑스 학교나 대학의 교사를 양성하는, 파리에 있는 에꼴 노르말(Ecole Nomale)에 입학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1842년에 입학시험을 통과하기는 했지만, 더 높은 점수를 받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그의 지식을 더 쌓기 위해 1년을 더 공부한 다음 에꼴 노르말에 입학했다. (최선의 노력에 못 미치는 것은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이러한 결정은 그의 전생애에 걸친 모든 연구의 특징이다.) 파스퇴르는 에꼴 노르말에서 화학을 공부했으며, 1845년에 과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좌절시키는 문제

그리고서 그는 같은 학교의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그의 과제는 그가 스스로 선택한 어려운 연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파스퇴르는 주석산염 결정(tartrate crystal)과 비주석산염 결정의 구조를 조사하고 그들의 차이점을 설명하기로 작정했다. 이 문제는 그 당시에 가장 위대한 화학자들도 좌절하던 것이었다.

그는 작은 결정의 복잡한 구조에 매료되었으며, 그것들을 창조주 하나님의 예술적 표현의 직접적인 증거라고 여겼다.1 그는 현미경을 통하여 결정들을 신중하게 관찰했다. 실험에 대한 구성을 철저히 하고 세부적인 것에 유의함으로써, 그는 다른 사람들이 놓쳤던 것을 간파하였다. 그것들은 실제로 두 가지 다른 형태의 비주석산염 결정인데, 서로의 상이 대칭인 것이었다. 그의 어린 시절에는 능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잘못 알았던, 서두르지 않고 신중한 접근은 파스퇴르의 위대한 자산중의 하나로 판명되었다. 그는 박사학위를 받았을 뿐 아니라, 연구하는 과학자들 중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파스퇴르는 스트라스부르(Strasbourg) 대학의 화학 교수가 되었으며, 그 후 5년을 그곳에서 강의와 연구를 하며 보냈다. 그는 또한 행복하게 결혼생활을 시작했으며, 가족을 이루었다.

과학의 새로운 분야

32세에 파스퇴르는 그의 연구와 강의의 방향을 바꾸게 되는 요청을 수락하였다. 그는 릴(Lille)로 가서, 과학자들이 그들의 이론적 지식을 공장과 사업장의 실제적인 과학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사용하도록 과학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응용과학 교수진을 구성할 것을 요청 받았다. 과학자 사회에서는 대개 이론적 연구를 지향하고 있었지만, 파스퇴르는 그가 사랑하는 과학을 보통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고 싶어했다. 그는 방향을 바꾸는 이런 기회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 새로운 응용과학 교수진을 구성하는 데에 파스퇴르는 2년을 보냈으며, 그 자신의 연구 노력은 발효 공정에 집중시켰다. 그 공정은 설탕에서 알코올을 얻는데 이용되는 것이었지만, 한편 우유를 시게도 한다. 대부분의 화학자들은 화학물이 단순히 서로 반응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공정에서는 가끔 기대하지 않았던 결과가 나오는 것을 설명할 수 없었다. 파스퇴르는 미생물이라고 부르는 작은 생명체가 있을 때에만 발효가 일어난다는 것을 증명했다. 올바른 미생물이 있다면 원하는 결과를 얻는다. 잘못된 미생물이 있으면 신 우유나 쓴 포도주처럼 잘못된 물질이 생긴다. 파스퇴르의 발견은 미생물학이라는 새로운 과학 분야를 확립하는 데에 기여했다.

자연발생에 대한 도전

1857년에 파스퇴르는 에꼴 노르말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학생이 아니라, 과학 연구실장(Director of Scientific Studies)이었다. 거기서 그는 미생물에 관한 연구를 계속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벌레, 쥐 및 구더기 같은 작은 동물들은 썩은 밀가루, 땀투성이 내의, 또는 썩은 고기와 같은 주변의 무생물로부터 자동적으로 생명체로 된다고 믿었었다. 생명체가 무생물로부터 생긴다는 이러한 믿음을 자연발생설이라 한다. 썩은 고기로부터 구더기가 자연적으로 생겨난다는 개념에 대해, 1668년에 이탈리아의 생물학자인 프란체스코 레디(Francesco Redi)가 성공적으로 도전하였다. 그는 거즈에 놓인 고기에 뚜껑을 씌워서 파리가 알 낳는 것을 막았더니 고기에 구더기가 나타나지 않았다. (사실상 구더기는 파리의 알에서 부화하는 유충이다.)

구더기, 쥐 및 벌레 등의 자연발생에 대한 개념이 일반적으로 거부된지 한참 후에도, 과학자들은 미세한 동물들의 자연발생 개념에는 여전히 집착해 있었다. 이 개념도 반증하기 위하여 파스퇴르는 존재하는 모든 미생물을 죽이기 위하여 묽은 수프를 끓였다. 그는 특별한 유리제품을 사용하여, 묽은 수프에 공기는 순환되지만 공기 중에 있는 미생물은 묽은 수프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파스퇴르가 예측했듯이 묽은 수프에서 미생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파스퇴르의 발견은, 묽은 수프 자체로부터 미생물이 자연적으로 발생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다. 미생물은 묽은 수프가 공기 중에 노출되어 미생물이 들어갈 수 있을 때에만 나타난다. 그는 심지어 미생물에 대해서도, 생명은 생명으로부터만 나온다는 것을 분명히 입증했다. '미세한 존재들은 분명히 그들과 유사한 부모로부터 세상에 나온다.'2

파스퇴르의 연구는 자연발생 개념에 치명타를 날렸다. 그러나 자연발생설은 진화론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진화론측 과학자들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연발생의 경우는 단 한가지도 발견된 것이 없다. 파스퇴르의 발견은 자연발생의 개념(따라서 그에 따르는 모든 과학적 결과들)과 모순된다. 결과적으로, 루이 파스퇴르는 다윈 이론의 강력한 반대자이었다.

저온살균법

이제 파스퇴르는 미생물에 대해 이론적으로 잘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가 발견한 것을 포도주가 썩는 것을 방지하는 실질적인 문제에 적용하려고 하였다. 많은 가정이 생계를 위해 포도주 산업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프랑스의 경제가 포도주의 수출에 매우 많이 의존하고 있었으므로 이것은 큰 문제이다.

파스퇴르는 묽은 수프에 사용했던 공정을 약간 수정하여 이것에 성공했다. 포도주를 끓이면 맛이 변하므로,파스퇴르는 맛을 변화시키지 않고 거의 모든 미생물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만 포도주를 가열하였다. 다음에 냉각을 하면 남아있던 미생물이 번식하는 것을 막아준다. (묽은 수프에서와 마찬가지로 역시 공기로부터 새로운 미생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할 필요가 있다.)

기쁘게도, 파스퇴르는 이 공정이 우유가 시게되는 것을 막아줄 뿐만 아니라, 다른 식료품들도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루이 파스퇴르가 이 공정을 특허 내려고 했다면, 그는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가 발견한 것을 아무나 사용할 수 있도록 하여 모든 사람이 그에 대한 특혜를 누리도록 하였다. 그가 받은 보상은 명성과 인정, 그리고 그 새로운 공정의 이름이 'Pasteurization (저온살균법)'으로 된 것이다.

비단 산업을 돕다

루이 파스퇴르는 감염된 알로 인하여 비단 산업이 위기에 직면했을 때 다른 그룹의 프랑스 농부를 돕도록 요청 받았다. 그는 농부들에게 현미경을 사용하여 감염된 알을 검출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다음에는 그런 알들을 죽임으로 누에 양식장에서 질병이 사라졌다. 파스퇴르는 그가 생계를 구해주었던 사람들에게 크게 감사를 받았다.

이런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파스퇴르의 적극적인 자세는 그가 다음에 얻게 되는 위대한 이론적 진전, 즉, 동물과 인간에게 나타나는 많은 질병들은 체내에 들어가서 번식하는 세균(해로운 미생물)으로 인한 것이라는 개념의 기초가 되었다.

최고의 상을 수상하다

프랑스 정부는 파스퇴르에게 최고의 상인 레종도뇌르 훈장을 주었지만, 대부분의 의료인들은 여전히 그의 개념에 반대했다. 몇몇 나이든 의사들은 세균과 예방접종에 관한 파스퇴르의 앞서가는 생각들을 따라갈 수 없는 것 같았다. 어떤 사람들은 의학이 아닌 화학을 공부한 누군가가 의학적인 연구를 수행한다는 것에 대해 분개했다. 오늘날의 저명한 창조과학자인 헨리 모리스(Henry Morris) 박사는, 대부분의 반대는 파스퇴르가 자연발생설과 다윈이즘을 반대했기 때문이라고 본다.3

그러한 반대자들은 오늘날 인간의 생명을 구하는 일에 개인으로서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이 파스퇴르라고 인정받고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4

광견병에 대한 승리

이러한 반대에도 단념하지 않고, 파스퇴르는 다음으로 인간의 질병이라는 가장 큰 단계로 전환하였다. 1882년에 그는 광견병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치명적인 질병은 개나 이리 등의 감염된 동물에게 물리면 걸리게 된다.

파스퇴르는 동물을 이용하여 실험을 시작했다. 그는 전과 같은 절차를 따랐지만, 동물이 사람을 문 이후, 세균이 머리에 도달하는 데에 수주일이 걸리므로 시간 지연이라는 제약이 있었다. 이러한 지연이 연구의 시간을 많이 걸리게는 했지만, 한편 중대한 치료상의 차이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전의 예방접종은 질병에 노출되기 이전에 백신을 투여해야 했다. 그러나, 광견병 세균이 두뇌에 도달하는 데에 시간이 지연되므로, 동물에게 물린 이후에 광견병 백신을 투여해도 된다. 따라서, 광견병을 가진 동물에게 물린 사람만 치료하면 된다.

1885년에 사람들이 광견병 걸린 개에 물린 작은 소년을 파스퇴르에게 데려왔다. 그러한 치료가 사람에게도 잘 들을는지 아직 확신할 수 없었지만, 파스퇴르는 백신을 놓지 않으면 그 소년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소년을 치료하고 절박하게 수주가 지난 후에, 광견병 백신이 성공적이었음이 밝혀졌다.

질병과의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1888년 파리에 파스퇴르 연구소를 설립하였다. 그 당시 파스퇴르는 거의 66살이 다 되었고, 쇠약해졌다. 그는 대개 자문하는 입장이었고, 연구를 지속시키는 일은 그가 훈련시킨 사람들이 담당했다.

그의 인생의 시련

루이 파스퇴르의 인생은 병과 비극으로 점철되었다. 다섯 자녀 중 세명이 유아 질병으로 죽었다. 또한, 그 자신도 유년 질병으로 인하여 정신박약자가 된 누이와 함께 자라났다. 이런 비극들은 그의 정신을 짓누르기보다는, 질병으로 인하여 그들의 자녀들을 잃은 애끓는 마음을 다른 사람과 나누려는 노력에 박차를 가하였다. 자기 자신에 있어서는 뇌출혈과 몇 번의 발작이 있었으며, 그로 인하여 부분적으로 마비되었다. 그의 상태는 과로로 인하여 때때로 악화되었다. 의약에 대한 그의 위대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그의 업적의 막대한 잠재력을 보았던 바로 그 사람들인 많은 의사와 수의사들이 강력하게 그와 맞섰다. 이런 모든 시련들을 겪으면서도 파스퇴르는 그의 기독교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파스퇴르는 항상 자신의 이익이나 칭찬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일했다. 그러나 그는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피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의 업적에 대해 인정을 받는 중요한 요인이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단순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는 훈장과 명예에도 불구하고 겸손을 유지했다.5 파스퇴르의 헌신과 철저함이 많은 위대한 발견을 가능하게 했다. 그는 용감하게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업적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부인했던 반대자들에게 다소 편협적이었다.

파스퇴르는 과학과 기독교 사이에 아무런 모순도 발견하지 못했다. 사실상 그는 “과학은 인간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해준다”6고 믿었다. 과학자로서 그의 연구에 있어서, 그는 무작위와 혼란이 아니라, 지혜와 설계의 증거를 감지하였다. 파스퇴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연을 연구하면 할수록 창조주의 업적에 놀랄뿐이다.”7

루이 파스퇴르는 1895년 9월 28일에 길고도 열매있는 생을 마치고 죽었다. 과학에 대한 그의 기여는 참으로 뛰어난 것이었다. 그의 기독교 신앙은 많은 시련을 겪으면서도 유지되었다. 그는 확고하게 창조론을 믿었으며, 다윈의 진화론은 과학적인 증거와 전혀 맞지 않으므로 강력하게 반대했다.

참고 문헌및 메모

  1. J.H. Tiner, Louis Pasteur—Founder of Modern Medicine, Mott Media, Milford, Michigan, USA, 1990, p. 18. 텍스트로돌아 가기.
  2. Louis Pasteur (quoted in Ref. 1, p. 63). 텍스트로돌아 가기.
  3. H.M. Morris, Men of Science, Men of God, Master Books, El Cajon, California, USA, 1999, p. 62. 텍스트로돌아 가기.
  4. Ibid., p. 62. 텍스트로돌아 가기.
  5. Ref. 1, p. 146. 텍스트로돌아 가기.
  6. Pasteur (quoted in Ref. 1, p. 90). 텍스트로돌아 가기.
  7. Pasteur (quoted in Ref. 1, p. 75). 텍스트로돌아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