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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이에 대한 오해

저자:
번역자: 한국어창조과학회 (creation.kr)

오늘날 창조과학자들은 갈릴레이 시대에 로마 가톨릭 교회가 범했던 실수를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다고 (창조과학자들의 입장을 반대하는 크리스챤들에 의해) 자주 비난 당한다. 그 당시 제도권 교회들은 태양이 지구의 둘레를 도는 것으로 성경이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했었다. 그 반대가 사실임이 갈릴레이에 의해서 밝혀진 후, 신자들은 성경 내에서 그들의 믿음에 어떠한 문제 없이 이 새로운 사실이 편안하게 수용될 수 있음을 발견했다. 갈릴레이를 둘러싼 역사적 사건들은 창세기에 기록된 대로의 창조를 주장하는 창조과학자들에게가 아니라, 유신론적 진화론자들과 오래된 연대의 지구를 믿는 사람들에게 경고가 되어야만 한다.

배경

Wikipedia.org 6308Galileo-Galilei
갈릴레이

2천 년이 넘는 이전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384–322 BC)는 지구가 완벽한 우주의 중심이고, 별들은 끝없이 원 운동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AD 2세기에 프톨레마이오스(Ptolemy)는 천동설(Ptolemaic system)로 알려지게 된 생각으로 이것을 확장하였다. (아래의 박스 글을 보라).

그리고 16세기에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1473–1543)는 지구와 행성들이 태양 둘레는 돈다는 더 나은 설명을 가정했다.1,2

17세기에, 갈릴레이(Galilei Galileo, 1564–1642)는 망원경을 가지고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를 반박하고, 코페르니쿠스를 지지하는 반복 가능한 관찰을 반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그는 태양의 흑점이 표면에서 움직이는 것을 관측하여, 태양이 완전하지 않으며 스스로 회전하고 있음을 알아내었다. 그는 금성의 상(phases)들을 관측하였고, 이것으로 금성은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있음이 틀림없음을 알아내었다. 그리고 그는 목성의 4개의 위성들이(지구가 아니라) 목성의 둘레를 돌고 있는 것을 발견했고, 지구가 모든 것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1618년에 그는 프톨레마이오스의 투명 구체(crystalline spheres, 행성들과 별들이 지구 둘레를 돌고 있는 것으로 추정)를 통해 쉽게 통과하는 3개의 혜성들을 관측함으로서, 이 구체가 상상임에 틀림없음을 보여주었다.

태양중심설(heliocentric system, 그리스어 helios는 태양) 또는 코페르니쿠스설(지동설)은 아리스토텔레스나 프톨레마이오스의 생각을 가르치며 생계를 이어가던 그 당시의 천문학자, 철학자들의 입장과 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변화를 거부하는 편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갈릴레이의 글들을 무시하며, 조롱하고, 파괴하며, 적의를 가지고 반대했다.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은 우주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 추종자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있었고, 성경은 천동설을 가르치고 있었으며, 갈릴레이의 주장은 성경과 모순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의 발견을 부인하기 위해서 갈릴레이를 죽음의 고통으로 밀어 넣을 만큼 맹렬히 반대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1. 이것은 당시의 교회 지도자들이 세계관의 과학적 기저를 이루고 있었던 아리스토텔레스나 프톨레마이오스와 같은 이교 철학자들의 믿음 체계를 교리로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교회 지도자들은 당시의 지식을 평가하는데 성경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해석하는데 그 당시의 지식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2. 그들은 갈릴레이가 반복적이며 과학적인 관측을 근거로 하여 논란의 여지가 없는 증거들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주에 관한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와 같은 ‘소수의 견해(minority view)’을 거부하고, ‘대다수의 의견(majority opinion)’에 매달렸다.

  3. 그들은 성경이 지구 둘레를 태양이 돌고 있음을 말한다고 생각한 몇몇 구절들을 성경에서 선택해 내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의 기록이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관점에서 이해하여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는데 실패했다. 모세가 ”해가 돋았더라 (risen) (창19:23)” 그리고 ”해가 진지라 (set) (창28:11)” 라고 기록했을 때, 그의 목적은 천문학적 관점으로 기술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세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그 당시 사람들이 말하던 표현으로 언어를 사용하였다.3 그리고 가장 편리한 기준 틀(reference frame, 이 경우에서는 지구)로 상대적 운동을 기술하는 것은 물리학에서 완벽하게 유효한 것이었다. (다음의 글 Sunspots, Galileo and heliocentrism 을 보라).

명백한 의미는 태양 자체가 움직인다는 이차적인 추론을 요구하지 않고, 보여지는 현상을 언어로 완벽하게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로, 이것은 오늘날의 기상학자들이 기상예보 시에 ‘해 뜨는(sunrise)’ 시각과 ‘해 지는(sunset)’ 시각을 알려줄 때 사용하는 것과 정확히 같은 것이다. 그들은 기준점을 지구로 사용하여, 보여지는 현상을 표현하는 언어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말을 편리하게 사용하였다고 해서, 기상 예보관들을 과학을 모르는 비과학적인 사람들이라고 취급하지 않듯이, 성경에 그러한 표현이 있다고 성경을 비과학적으로 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분명히 시적 표현을 의미하는 시편 19:6, 시편 93:1 과 같은 구절들은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4,5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시19:6).

”...여호와께서 능력을 입으시며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요동치 아니하도다”(시93:1))

오늘날

오늘날 우리들은 대부분의 과학적 제도들이 자연주의(naturalism, 모든 것들이 자연적 원인에 의해서 설명되어질 수 있다는 믿음)와 오래된 연대(long ages)에 매우 편향되어 있는 세계에 살고 있다. 과학적 제도들은 우주의 모든 것들은 한 번의 큰 폭발(빅뱅)로 기원되었으며, 수십억년 동안의 진화를 거쳐서 모든 것들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을 주장함으로서, 자연주의적 믿음 체계를 선전하고 있다. 오늘날 정말로 많은 천문학자, 과학자, 교사들이 이러한 이론을 가르침으로서 그들의 생계를 꾸려가며, 돈을 벌고 있고, 경력을 쌓아가고 있다.

그러나 천동설과 같은 이러한 생각은 비록 재치가 있고 무신론자들에게 아마도 설득력 있게 보이기는 하겠지만, 복잡함과 모순으로 가득 차서 짐이 되고 있으며, 간단히 말해 틀린 생각이다.6

동시에, 우주와 생명체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하나님에 의해서 직접 창조되었음) 성경은 더 잘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들과 반대의 입장을 가지고 있는 창조과학자들은 과학자들 중에서 소수이다. 그들은 설계의 흔적들, 화석 기록, 세포 내의 엄청난 정…과 같은 것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면 기대되는 것들이라고 말한다. 갈릴레이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모든 증거들은 무시당하고, 조롱당하며, 감춰지고, 기존 과학계에 사람들에 의해서 악의적으로 반대되고 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교회의 지도자들은 대학에서 가르쳐지는 과학에 의해 설득 당하여서,빅뱅, 수십억년, 진화론과 같은 것들이 모두 성경과 양립할 수 있다고 말함으로서, 무신론자들의 공격을 피하여 버렸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소수(창조론자들)의 견해를 반대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1. 그러한 교회 지도자들은 찰스 다윈(Charles Darwin), 리차드 도킨스(Richard Dawkins), 스테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등과 같은 비기독교인(즉 이교도)의 믿음 체계이며 철학을 교리로서 받아들였다. 그래서 17세기의 전임자들처럼 당시의 지식을 평가하는데 성경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해석하는데 당시의 지식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2. 그들은 오래된 연대의 지구와 우주를 반대하고 있는 (젊은 연대를 나타내고 있는) 압도적인 관측들이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행해졌던 어떠한 (반복해 볼 수 있는 소수의) 실험 결과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진화는 확립되지도 않았고, 관측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견해(minority view)’을 거부하고 ‘대다수의 의견(majority opinion)’에 매달렸다.7

  3. 그들은 창조에 대한 창세기의 기록을 신화로서, 또는 오래된 시대에 걸쳐 일어난 일로 설명하며 빠져나가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창세기에서 저자가 전달하려고 했던 표현으로 이해하여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 실패했다. 따라서 본문을 읽을 때에 모세의 목적은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신화들이나 옛날이야기들을 수집해서 늘어놓기 위함이 아니며, 창세기 1장의 날들은 오래된 시대와 같은 어떤 것의 은유적인 표현이나 원시문화의 사람들에게 수십억 년을 간단하게 설명하기위해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8 오히려 성경은 모세가 세계 역사를 태초의 창조 시점에서부터 히브리인들의 이집트 도착까지를 문자 그대로 기록하면서 창세기를 썼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갈릴레이의 상황에 대한 흥미로운 오해이다. 그 이후 교회 지도자들은 성경에서 시의 형태(poetic format)로 쓰여졌거나, 시가서의 구절들은 문학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오늘날에 그들은 산문으로 쓰여졌거나, 글자 그대로의 역사를 의미하는 성경의 구절들까지도 시(poetry)로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진정한 교훈

창조과학자들은 교회가 17세기에 했던 것과 같은 똑같은 실수를 (즉 성경이 사실과 다른 것을 말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교회들이 대체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다. 교회는 역사의 교훈을 배우지 못했다. 그리고 성경을 지지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아직도 권위적인 대중적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것을 고집하고 있다.

갈릴레이 시대의 교회 지도자들이 실수로 성경이 지구중심설을 지지한다고 생각했다 할지라도, 지구가 움직인다는 개념은 본질적으로 무신론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지구와 태양의 상대적인 움직임을 방어하기 위한 다른 교리가 없었다.

이에 비해, 진화론은 기원에 대한 무신론적 설명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사회에 널리 퍼져있는, 하나님을 반대하는 세속적 인본주의를 정당화하고 있는 이론이다. 또한 하나님을 죽음과 고통의 저자로 만들고 있다.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의 역사로, 창세기의 날들을 지구의 일상적인 날들로 받아들이지 않는 기독교인들은, 다른 많은 성경 구절들과 교리들을 설명해야만 할 것이다. 예를 들면, 타락 이전에 동물들의 먹이가 되는 녹색 식물들(창1:30), 안식일의 계명(출20:9-11), 하나님이 태초에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는 예수님의 가르침(마19:4), 최초의 남자와 여자에 기초한 결혼에 대한 가르침(마19:3-9), 아담이 글자 그대로 최초의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기초한 복음에 대한 바울의 설명(로마서 5장, 고린도전서 15장…등

따라서, 갈릴레이로부터의 교훈은 교회가 진화론을 반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화론을 반대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과학은 진화론을 입증하지 못했고, 오히려 진화론은 과학에 반대됨이 입증되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에도 명백히 반대되기 때문이다.

galileo1

프톨레마이오스 계 (The Ptolemaic System, 천동설)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하면, 태양, 달, 행성, 별들은 일련의 오목한, 수정구체(crystalline spheres)의 둥지 안쪽에 고정된 지구 둘레를 돌고 있었다. 이것은 지구중심설(geocentric or earth-centred system) 이라고 불리웠고, 천동설로서 알려져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설이 완전히 설명하지 못했던 몇 가지 문제점들이 있었다. 특히 지구에서 보여 지기에 하늘을 가로지르며 앞뒤로 움직이는 행성들의 움직임이었다. 그래서 그는 독창적인 그리고 처음에는 설득력이 있었던 몇 가지 메커니즘을 가정했다. 그러나 결국 불가능하도록 복잡하고, 과학적으로 잘못되었음이 밝혀졌다. 예를 들어 각 행성들은 주전원(epicycle)이라 불리는자신의 작은 곡선 내에서 움직인다고 말했다. 반면에 모든 주전원들은 지구 둘레를 더 큰가상의 원(deferents) 내에서 움직였다.

[*Ed. notes:

  • Thomas Schirrmacher 박사의 글 The Galileo Affair: history or heroic hagiography, Journal of Creation 14(1):91–100, 2000 “은 전설과는 반대로, 갈릴레오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교회 공직자들에 의해서 매우 존중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갈릴레오는 자신의 오만, 동료들의 시기, 그리고 교황 어반 8세의 정책 등에 의한 희생자였던 것이다. 그는 성경을 비판한다고 고소당한 것이 아니라, 교황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소당했다.”

  • 또한 Danny Faulkner 박사의 글 Geocentrism and Creation 과 Q&A의 다른 글들을 참고하라 Q&A: Astronomy and Astrophysics. ]

참고 문헌및 메모

  1. His book 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 (On the Revolutions of the Celestial Spheres), published in 1543, challenged Aristotle’s (and thus also at that time the Church’s) teaching that the earth was the centre of all change and decay, and that around it were the changeless heavens. 텍스트로돌아 가기.
  2. In the Copernican system the earth and planets circle the sun, with the earth taking one year to do so; in the Ptolemaic system the sun, planets, and stars are all required to circle the earth every 24 hours. A huge problem with the latter system is that the nearest star, Proximus Centauri (also known as Alpha Centauri C), is 4.3 light years away, so that if this star circled the earth every 24 hours, its speed would need to be nearly 10,000 times the speed of light (and much greater speeds would be needed for the more distant stars). 텍스트로돌아 가기.
  3. Similarly, Joshua was using the language of appearance in Joshua 10:12–13. For a discussion on this miracle, see my article 여호수아의 긴 하루 Creation magazine 19(3):35–37, June–August, 1997. 텍스트로돌아 가기.
  4. Psalm 19:4–6 metaphorically describes the sun as coming forth from a tent in the heavens, and also personifies the sun both as a bridegroom and as a strong man running a race. One would have thought that even the inflexible literalists of Galileo’s day might have allowed the writer of this Psalm to have meant it to have had a poetical meaning. 텍스트로돌아 가기.
  5. In Psalm 93:1, the phrase ‘the world also is established, that it cannot be moved’ needs to be read alongside v. 2, ‘[God’s] throne is established of old, where the same Hebrew word [kown = ‘established’] is used and has the meaning 'set up', 'stable', 'secure', 'enduring', ‘confirmed’, etc., not ‘immobile’ or 'stationary’. Likewise the Hebrew word for ‘moved’ (v.1) is used in Psalm 16:8, ‘I shall not be moved’, meaning that the writer would not stray from the path of the Lord, not that he was rooted to any one spot. 텍스트로돌아 가기.
  6. For example, the exponents of the big bang fail to say where the energy originally came from, where the laws of science came from, and what it was that ‘quantum fluctuated’ before there was anything there to fluctuate, and so on—see What about the big bang? and If God created the universe, then who created God? Molecules-to-man evolution is contrary to the principles of thermodynamics, as well as to the law of biogenesis (life comes only from life), the fossil record, and much more. 텍스트로돌아 가기.
  7. See, for example, John Morris, The Young Earth, Revised & Expanded, Master Books, 2007, and Evidence for a young world by Russell Humphreys. 텍스트로돌아 가기.
  8. Top-flight Hebrew academics, e.g. Professor James Barr of the University of Oxford, are unanimous that the plain meaning that the Hebrew text is intended to convey is that ‘creation took place in a series of six days which were the same as the days of 24 hours we now experience’. (See Six days? Honestly!) 텍스트로돌아 가기.